네이밍과 콜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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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잉글리씨드 작성일20-01-14 11:19 조회9,15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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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밍과 콜링
의미의 탄생 천금말씨
나는 이름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한자와 소리글자의 파동으로 이름 짓는 방법을 배웠다. 가족이나 친지들이 청하는 작명은 물론, 상호명 내지 기업의 이름까지도 지어 주곤 했다. 이름을 지을 때 나는 특히 이름이 갖는 의미에 방점을 둔다. 내 이름이 갖는 의미가 나의 무의식에 영향을 제법 끼쳤기 때문이다. 내 이름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의식하게 된 것은 유학 시절 나를 소개할 때부터였다.
“내 이름은 ‘동엽’, 성은 ‘차’야라고 첫인사를 하면, 그다음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똥유-ㅂ? 그게 무슨 뜻이지?”
“동녘 동, 빛날 엽, 그러니까 동쪽의 빛이라는 뜻이지, 결국 태양을 뜻해,”
이렇게 이름풀이를 해주다 보니 절로 ‘동쪽의 빛’이라는 자의식이 내 안에 틀을 잡기 시작했던 것이다. 모르긴 모르되 이 자의식은 지금까지 건강하게 나와 동행해 주었고, 이윽고 사명감으로도 굳혀졌다.
‘나’라는 존재의 의미는 이처럼 이름을 통해서 제일 먼저 형성된다.
의미는 언어를 통하여 탄생한다. 아직 언어화되지 않은 의미는 엄마 배 속에 있는 태아와 같은 처지다. 생명으로 존재하기는 하지만, 미처 태어나지 않은 생명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시는 한낱 아름다운 시구가 아니라, 진리를 담고 있는 철학적 명제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주의를 요하는 것은 똑같은 팩트도 보는 관점에 따라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동일한 사실을 놓고도 어느 관점을 취하여 표현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기에 어떤 사실에 이름 붙이는 일, 곧 네이밍은 신중에 신중을 요한다. 네이밍은 어떤 가치중립적인 현상을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 수도 있고, 긍정적으로 보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김수환 추기경은 살아생전 어떤 부탁에도 웬만하면 거절하지 않았다. 노래를 잘 못하면서도 한 곡 청하면 불러 줬고, 책 추천 글을 잘 써주었고, 생선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사람들과 어울리는 식사 자리에서 일부러 잘 먹어주었다. 이를 놓고 어떤 사람은 “성격이 여려서 우유부단하다”라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속사정을 잘 아는 사람은 “위대한 사랑의 실천가”라고 이름 붙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네이밍은 심리학적으로 이른바 피그말리온 효과나 그 정반대인 스티그마 효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긍정의 언어, 곧 격려와 칭찬을 통해서 상대방에게 긍정의 변화를 일으키는 ‘기대 효과’인 피그말리온 효과에 대해서는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 반대로 부정적인 암시나 태도, 선입관을 가지고 대하면, 상대방이 그에 부응하여 부정적인 행동으로 반응한다는 스티그마 효과, 곧 ‘낙인 효과’에 대한 인식은 덜하다. 여기서 스티그마가 시뻘겋게 달군 인두로 가축에게 낙인을 찍는 것을 가리킨다 하니, 스티그마 효과는 말뜻 그대로 매우 끔찍한 현상을 일컫는 셈.
예를 들어 친구들 사이에서 누군가를 성격이 독특하다는 이유로 ‘돌아이’라고 불린다고 치자. 이 말은 당사자에게 낙인이 되어버리고 스스로 “내가 이상한가?” 하고 의심하게 만들며, 결국 정말로 성격을 괴팍하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이 스티그마 현상은 우리의 마음 상태에 이름을 붙일 때도 나타난다.
미국의 심리치료사 에릭 메이젤은 우리 사회에 번지고 있는 우울증이 만들어진 병으로서, 인간의 슬픔에 잘못 붙여진 꼬리표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다양한 사례와 연구 결과를 통해 사람들이 ‘슬픔’을 느낄 때, 무의식적으로 “우울증에 걸렸다”라고 언어 교체를 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지극히 정상적인 슬픔이라는 감정을 우리 내부에서 원하지 않기에, 비정상적인 단어로 교체해 버린다는 것!
지금 이 순간에도 비슷한 일은 수없이 일어난다. 대중 앞에 서면 떨리는 자연적 심리 현상을 두고 “공황장애가 있다”고 부풀려 예단하는 일이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노화에 따른 단순한 기억력 감퇴 현상을 놓고 “내가 치매에 걸렸나 봐” 라고 말하곤 한다.
도전한 일이 몇 번 뜻대로 안 되었다고 해서 “내겐 운이 따르지 않아!”라고 못 박아 단정하는 경우도 결국 같은 범주의 불행이다.
어떤 사실에는 이름만 잘 붙여 주어도 전혀 다른 의미가 탄생한다.
발명왕 에디슨은 노년에 난청에 시달렸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는 뒤집어 생각했다. “나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들을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이렇게 바꿔 말하니, 그의 핸디캡은 오히려 장점으로 둔갑했다.
언어는 사실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어 버리기도 한다. 어떤 사람의 머릿속에서는 조그만 웅덩이가 호수만큼이나 거대하게 여겨진다. 또 어떤 사람의 머릿속에서는 드넓은 호수가 웅덩이만큼이나 작게 여겨진다.
이유는? 첫 번째 사람은 웅덩이를 호수라고 불렀다. 두 번째 사람은 호수에 웅덩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것이 말의 힘이다.
결국 이 세상 모든 의미는 우리의 네이밍, 곧 ‘언어화’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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